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정병하 (조선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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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. 본문

정병하(鄭秉夏, 1849년 ~ 1896년 2월 11일)는 조선 말기의 관리이자 개화파 대신입니다. 본관은 온양(溫陽), 자는 자화(子華), 호는 남고(南皐)이며, 중인(中人) 출신입니다. 시호는 충희(忠僖)입니다.
생애 및 활동:


  • 1881년(고종 18)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보낼 때 통상사무아문의 관리로 참여하여 광산, 조폐, 제철, 피혁 등에 관련된 기계 구입을 위해 오사카에 파견되었습니다.
  • 1883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사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.
  • 1885년 12월부터 1888년 5월까지 부평부사를 역임했습니다.
  • 김옥균의 영향을 받아 개화파 정치인이 되었으며, 김홍집 내각에 들어가 1894년 갑오개혁과 1895년 을미개혁에 참여했습니다.
  • 갑오개혁 과정에서 일본 측으로 많이 기울었으며, 을미사변 당시 일본 낭인들의 침입을 알고도 거짓 보고를 했다는 의심을 받았습니다.
  • 을미사변 이후 명성황후 폐비를 주장하고, 단발령 시행에 앞장서 고종의 머리카락을 직접 자르기도 했습니다.
  • 1894년까지 밀양부사로 재임하면서 『농정촬요(農政撮要)』를 편찬하고, 낙동강 둑을 막아 농토를 넓혔습니다.
  • 1890년 전운사를 겸임하고, 이운사(利運社) 설립에도 관여했습니다.
  • 밀주장정(密州章程)이라는 향약을 만들고, 극락전(極樂殿)이라는 불교 사찰을 건축하기도 했습니다.

몰락과 최후:

  • 1896년 아관파천 당일 고종에 의해 역적으로 분류되어 체포되었고, 사망했습니다.
  •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경무청 앞에서 김홍집과 함께 순검들에게 참살되었다는 설과, 길에서 백성들에게 돌에 맞아 죽었다는 설이 있습니다.

사후:

  • 그의 동료였던 유길준, 조희연, 장박, 우범선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.
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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